6. 관형찰색

3.

동물의 성품은 머리와 몸의 비율, 임맥과 독맥의 상대적인 발달 정도, 입술 모양, 눈의 크기, 몸에 털이 있느냐, 깃털이 있느냐, 비늘이 있느냐, 아니면 딱딱한 껍질을 가졌느냐....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동물을 六經的으로 분류를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털이 난 동물 즉 호랑이, 산돼지, 곰 등의 맹수를 毛虫이라 하는데 이러한 동물들은 木에 속하고, 우리 인간과 같이 발가벗은 동물을 裸虫이라 하는데 太陰濕土에 해당하겠지요. 그리고 甲殼類와 같이 딱딱한 껍질에 싸인 것은 陽明燥金에 해당되고, 비늘이 있는 생선류는 水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른 사람에겐 바다에서 나는 해조류, 생선 등을 많이 먹도록 권해야 합니다.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太陽寒水에 해당되고, 털이 있는 짐승(맹수)은 少陰君火에 해당됩니다. 한편 같은 火라도 少陽相火는 깃털달린 것으로서 매우 공격적인 성품을 가진 독수리나 벌 따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대충 분류를 하면 다소 무리한 점도 없지 않지만 참고로 해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정도만 알아도 어떤 동물이 그 해에 크게 번성한다면 그 해는 그 동물이 생활하기 알맞도록 風・寒・暑・濕・燥・火가 적절히 구성되어 있다고 추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丙寅年은 寅申相火의 해이므로 건드리면 톡톡 쏘는 쐐기나 모기가 번성한다든지, 어떤 해에는 날파리나 메뚜기떼가 번성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동물의 성품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메뚜기를 예로 들자면 머리 부분이 큰가 몸통이 큰가? 날개가 있는가. 눈이 발달되었는가. 입은 어떻게 발달되었는가. 심지어는 메뚜기의 맛을 보아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슷한 종류인데도 방아깨비처럼 순한 것이 있는가 하면 사마귀와 같이 아주 독한 것이 있으므로 참으로 예리하게 판별치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이론보다는 직관에 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펠리칸이 번성하는 나라와 독수리가 번성하는 나라가 있다고 할 때 어느 나라가 더 평화롭겠습니까? 명태가 많이 잡히는 나라와 상어가 많이 잡히는 나라가 있다고 할 때도 어느 나라가 더 평화로울까요? 周易學者나 五運六氣學子는 이런 징조를 금새 알아차리고 그 민족성을 꿰뚫어 봅니다. 어느 동네에 가니 버섯이 많이 나더라, 어느 동네에는 선인장이 많더라....하면 이내 그 동네의 土質을 알 수가 있지요.

여러분! 이런 징조를 보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버지를 보고 잘 모르겠으면 그 아들을 보고, 땅의 토질을 보고자 할 때는 그곳의 나무를 보라고 했습니다. 산지나 그 식물이 자란 때의 영양상태나 기후까지도 식물 하나만을 보고 추리해 낼 수가 있습니다. 무생물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뾰족뾰족한 돌이많고 산들이 대체로 모가 난 나라의 사람들은 '잔인하거나 폭력적이겠구나'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동식물은 물론 무생물까지도 서로 얽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있음을 여러분은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개를 보세요. 국민성과 같이 양순하기 짝이 없지요. 야채를 주로 먹는 우리 나라 개에 비해서 고기를 주로 먹는 서양의 개들은 대체로 난폭하고 사납습니다.

植物觀相, 動物觀相, 人間觀相 심지어는 음악, 미술 등의 예술까지도 六氣, 즉 風・寒・署・濕・燥・火와 미묘한 연관이 있습니다. 왕의 사당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孔子는 "머지 않아 정변이 일어나겠군"하고 짐작을 하더랍니다. 어떤 일에는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징조가 있습니다. '금년에 보리가 대풍작이다'라든가 '금년엔 울릉도 오징어가 풍어다'고 할 때 周易學者들은 이것을 六經에다 대입을 시키고 거기에서 표출되는 양상으로 "아! 어떤 일이 벌어지겠구나"하고 알아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産地를 보고도 성품을 알 수 있고, 그것의 생김새를 보고서도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지요.

지상과 지하를 구분해서 보는 陰陽 구별법을 말씀드렸었는데 땅에 사는 식물이 아니라도 음양의 구별은 가능합니다. 물 위에 사는 식물을 볼 때도 마찬가지지요. 물위나 아래의 어느 한 쪽이 반대 쪽보다 훨씬 크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독성이 강한 식물일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개구리밥(浮萍草)이 있지요. 浮萍草는 피부병에 특효약입니다. 그러면 이 부평초는 가볍게 작용할까요? 무겁게 작용할까요? 부평초는 가볍게 작용하므로 두통에도 잘 듣습니다. 

 

나팔꽃을 보면 뿌리는 아주 작고 땅속으로는 얕게 들어가 있지만 위로 감고 올라가는 힘과 높이는 대단하지요. 그러므로 나팔꽃은 쉽게 식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 마늘이나 양파같은 것은 지상부분이 지하부분보다 훨씬 큰데 어떻게 식용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지상부분이 더 크다고 해도 그 식물의 전체적인 무게중심은 지하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파와 마늘은 上氣가 되지요. 마늘을 생으로 먹으면 憤心을 돋구고, 익혀서 먹으면 음심을 돋군다고 합니다. 憤心을 돋군다는 것은 바로 上氣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上下의 균형이 맞는 식물(약초)을 성스럽다하고 또는 靈草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식물을 어찌 上下 관계만으로 나눌 수 있겠어요? 관찰법 이외에도 맛을 보거나 향을 맡거나 산지를 보는 방법을 통해서 식물을 감별할 수 있지요. 그리고 모양의 생김새 외에도 질을 보기도 합니다. 민들레 꽃씨가 터지기 일보직전에 있는 경우라든가 배추가 중심을 향해 모이는 상황이나 난초처럼 바깥으로 축축 처지는 성질, 쭉쭉 뻗어 올라가는 것과 빙빙감아 올라가는 덩쿨도 있지요. 또한 이런 생김새도 보지만, 소나무 껍질과 같이 단단한 것, 선인장 껍질과 같이 보드랍고 매끄러운 것, 또는 매끄러운 것 등의 질을 보기도 하고 색을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식물과 六經에 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휘어감는다든가 바깥에서 안으로 오그라드는 성질이 있는 덩굴식물류는 厥陰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이런 식물은 收歛하고자 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속이 실한 경우가 많지요. 蘭을 키우고 계신 분은 잘 알 것입니다. 蘭은 섬세하고도 유연한 인상을 주지요. 이렇게 간들간들 간드러지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것은 少陰君火에 속합니다. 칸나, 수선화, 히야신스, 양귀비와 같이 간들거리면서 예쁜 꽃들도 모두 少陰君火에 속합니다. 과일도 마찬가집니다. 배처럼 딱딱한 것이 있는가 하면 복숭아와 같이 연한 것, 또는 바나나와 같이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있습니다. 또 식물이 자라는 산지에 따라서 그것이 가진 속성과 형태가 다 다른 것이 민심과도 연결이 됨을 五運六氣法을 배우는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이제 상당히 자신감이 생기셨을 줄 압니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처음에는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그 자신감이 엷어지더군요. 왜 그럴까요? 지금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이론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벌써 몇 번째 강조되는 이야기입니다만 결국은 이론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의 직감과 직관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만물은 단순한 음양이나 몇 가지 六經的 이론만으로 알 수 있도록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국민학교 어린이가 미술시간에 蘭을 그리라고 하니까 보석을 가득 그리더랍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고 담임선생님이 묻자, "우리 아버지는 난초를 보석보다 더 귀히 여기십니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서 다시 蘭을 그렸을 때에는 난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은 이론적이 되고, 속으로부터 뻗어나오는 느낌을 억누르고 외부로부터 들어가는 이론과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중섭이나 피카소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대상 자체의 형질적인 점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받는 느낌, 속으로부터 반향되어 나오는 인상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나아가서는, '틀'이 없는 그림인 비구상을 하는 화가도 많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네 동양의학도 직관을 중요시하는 공부를 해야지 따분하고 지루한 이론이나 지식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날인데도 우울할 수가 있고, 추적추적 장마비가 계속되는 데도 명랑한 날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차내 분위기가 어색합니다. 그러면"아! 조금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군!" 이런 느낌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벼랑의 바위틈에 붙어 있는 난초에서부터 화원에서 곱게 가꾸어지는 장미꽃에 이르기까지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다른 식물의 기분을 살필 수 있을 만큼 여러분은 민감해야 됩니다. 민감하지 않으면 육경공부가 이론화되어서 사물을 대함에 그저 이론적으로 분류하게 되고 맙니다. 어떤 느낌을 잡으려 하지 않고 "이 사람은 厥陰・少陰・太陰・少陽・陽明・太陽 중 어디에 속할까"하고 분류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섯가지 틀을 만들어서 그 틀 속에 사람을 집어 넣습니다. 너는 무슨 형! 저건 무슨 형! 이라고 판단하는 즉시 여러분은 자신의 판단에 속기 시작합니다. 순간적으로 맞았다면 몰라도, 사람을 어떻게 틀 속에 넣어 고정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지식이나 선입관없이 냉철하게 볼 수 있는 心眼의 개발이 중요합니다.

뚜껑없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어느 축제날, 한 사람이 발을 헛디뎌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축제에 들뜬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람의 구원 요청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밤이 깊어 축제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구조의 손길은 닿지 않고, 무심한 별들만이 반짝였습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스님이 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스님 절 좀 올려 주십시오" 그러자

"당신은 아마도 전생의 업 때문에 여기에 빠졌을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업은 다 치뤄내지 않으면 끝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부디 그 속에서 당신의 업을 다 치루시기 바랍니다. 소승이 宿命通을 얻었다면 당신 전생의 업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텐데...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는 총총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물에 빠진 사나이는 스님의 무심함을 한탄하며 다시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사회개혁가가 지나가다가 사람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빠진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황급히 일어서서 사회개혁가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현 사회는 이런 모순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에 우물에 뚜껑을 하지 않다니! 지금 당장 가서 전 세계의 우물에 뚜껑을 만들어 달도록 발벗고 나서겠습니다. 서명운동도 하고, 정치가를 만나서 설득도 하겠습니다" 

"아니? 여보시오. 설득도 좋고 개혁도 좋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할 거 아니요?"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이란 사회 전체의 개선을 위해선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당신과 같은 이런 희생이 좋은 본보기로서 꼭 필요한 때입니다. 제가 당신을 구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희생은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자기 스스로의 內革을 못한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사회를 개혁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우물에 빠진 사람은 이제 자포자기를 했습니다. 

"에라 믿지 않았던 하느님이지만 마지막으로 기도나 하고 죽자!"

그러자 위에서 두레박이 내려왔습니다. 놀라서 올려다 보니, 금분이 노랗게 칠해진 검은 성경책을 가진 목사가 구조의 두레박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 하느님은 역시 하느님입니다. 고맙습니다" 

우물에 빠진 사람은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었습니다. 이윽고, 목사가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은혜로운 종교인이십니다. 고맙습니다"고 인사를 하자,

"항상 예수님께서는 불쌍하고 고통받는 자를 구원하고 위안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할 때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당신의 아들 딸에게도 자주 우물에 빠지는 법을 일러주십시오. 그리해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구원이 선행되지 않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 종교인은 간접적인 폭력자입니다. 이 모든 것의 이유는 바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무의촌 봉사는 강원도 첩첩산골의 어느 마을로 결정되었습니다. 선배님은 왜 안가십니까?" "야 임마! 기왕이면 경치좋고, 소주라도 한 잔 할 수 있는 데가 좋잖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거룩한 허준선생님의 후예로서 한 끼 밥을 굶더라도 오직 봉사와 희생과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위대한 삶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일종의 Ego일지 모릅니다.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조차도 관찰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식물을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 이론만으로 신비한 식물의 세계를 어떻게 탐사할 수 있을지 저는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들에게 쏟고 있는 사랑의 9할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래에, 부모님들이 당대에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주도록, 맺힌 한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한, 당신들의 분신에 대한 사랑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인간관계에 '이용'이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강조하느냐 하면, 식물의 성품을 알면 오직 치병에 쓰고자 해야 하고, 쓸 때는 부득이 쓰는 마음을 가져야지, "저건 어디 먹으면 좋아, 저건 정력제야, 저건 어쩌구..." 이래선 안되겠지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대로, 고통을 고통 그대로 느끼고 볼 줄 아는 심안을 열도록 해야지 얕은 생각을 굴리면 마음이 편하질 못하지요. 여러분이 선문답을 들을 때 마음속에 청풍이 솨아 하고 불어옴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참의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우리는 산 송장과 같습니다. 살아서 펄펄 끓는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지식과 이론과 수만년 동안에 누적된 부질없는 전통과 관습, 습관에 물들어 있는 우리는 사실 산 송장들입니다. "내가 이래뵈도 한의대생인데, 얼굴도 잘 생기고, 집도 부유하고, 또 몇 가지 주워들은 풍월이 있는데..." 이런 명예의식, 이런 교만의식이 여러분의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동양의학 이전에 동양철학입니다. 동양철학의 근본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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