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운 육기
2.
그러면 경락 체계라고 불리는 이러한 리듬체계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金容沃 교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인용하여 문제점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김용옥씨는 心包에 대한 의문을 예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흔히 心包를 해부학적인 측면으로 연구 파악하려는 경향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습니다.
"산림경제" 제1권 P.50에 包絡으로 된 번역문에 주를 달기를 (포락(包絡):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 즉 心臟膜이다)라고 하여, 包絡을 心臟膜 곧 心包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文意를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고 할 것이나 包絡을 곧 심장막과 동일시하는 것은 많은 곡해를 유발시킬 우려가 있다. 高世植의 說을 따르자면 包絡의 包만으로 心包의 뜻이 되며, 包絡이란 정확하게는 心包의 絡脈을 설명하면서 그 중 一經으로 '心主手厥陰心包絡之脈'을 들고 있는데, "靈樞"가 漢代의 古經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꽤 오래 전부터 心包와 心包絡은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주석에 의존치 않고 "內經"의 原義에만 卽하여 해석할 때 '包絡絶'의 '包'가 과연 心包를 정확히 의미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黃帝內經素問" 卷第三 鈴蘭秘典論篇 第八에 十二藏之相使(十二藏腑의 서로 부림)를 논하는 곳에서 十二經脈의 하나로서 心包에 해당되는 장기를 心包라 하지 않고 단중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심포와 단중이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데에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서 "內經素問"이 씌어진 그 당시 心包라는 장기의 개념이 정확히 성립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心包를 심장막이라고 해설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심장막이라고 하면 현대어로서는 꼭 심장의 판막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에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단서가 붙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가 발생치 않는다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반 독자들에게 心包의 해설로서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해부학적 정의 자체가 적합치 못하다는 것이다. 心包라는 장기가 한의학에서 차지하는 총체적 의미가 먼저 밝혀졌어야 했을 것이다.
心包는 결코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심장의 부속기관적 해부학적 실체가 아니다. 心包는 심장과 독립된 별개의 독립 장기이다. 즉 한의학의 인체론의 最基本인 十二經脈 중에서 五臟六腑를 제외한 나머지 하나의 經脈으로서 육부의 三焦에 부응하는 하나의 독립장기가 곧 心包이다. 心包가 과연 실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느냐 하는 것은 역자의 해설처럼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오늘날까지 心包의 실체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心包라는 장기의 개념 성립 과정이 心包라는 해부학적 실체가 먼저 발견되고 거기에서 시작되는 經脈이 상정되었다고 보기보다는 十二經脈이 먼저 성립하고 난 후에 十二經脈 중 하나에 해당되는 어떠한 기능적 단위로서의 장기가 상정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생론적 고찰은 중국의학 술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일반가설을 성립시킨다. 즉 한의학에서 말하고 있는 장기의 명칭이 실체적 규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기능적 규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의 장기들은 오늘날 서구 의학에서 발달시킨 병리해부학적 인식 위에서 성립한 실체가 아니라 경락상의 기능을 담당하는 어떠한 개념적 단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腎은 곧바로 오늘날의 腎臟(kidney)이라는 실체와 동일시되기 힘든 면이 많다. 腎은 신장 그 자체라고 보기보다는 先天의 元氣가 모이는 곳이며, 생식기능과 관련되어 있는 어떠한 기능상의 기관으로, 오늘날의 서양의학적 해부학적 실체로 말하자면 副腎과 性腺의 복합적 기능을 상징하는 그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脾도 오늘날의 脾臟(spleen)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현대 서양의학에서 취급하는 비장은 일종의 조혈기관으로, 여기서 적혈구가 파괴되고 헤모그로빈(Hemoglobin)이 유리되어 간으로 수송되어 빌리루빈(Bilirubin)으로 전화하는데, 이 임파성 기관은 한의학에서는 독립장기로 확연히 인식된 적이 없고 개념적으로 肝의 개념 속에 포섭되는 종속된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內經學에서부터 명시되고 있는 脾는 오늘날의 의학술어로는 膵臟(pancreas)을 의미한다. 췌장 중에서도 외분비(즉 랑게르한스섬의 기능을 제외한) 관계의 소화효소분비 기능을 지칭하며, 胃라는 腑와 상응하는 臟이다.
우리 속말에 '그 녀석 비위도 좋다'라고 할 때 脾와 胃는 모두 土에 속하며 모두 소화관계 기관이다. 이 때 脾는 물론 비장(spleen)이 아니라 췌장(pancreas)이다. 고전 속의 脾를 '비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자적 동일성 때문에 개념적 동시성을 파괴하는 좋은 일례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장기의 실체성에 관한 문제 또한 번역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이다. 우리 고전상의 한의학 개념을 서양의학 개념과 대비시키는 작업은 일본의 蘭學子(란가쿠샤)들이 화란에서 수입된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췌장의 膵란 말도 중국글자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擬字이며, 그들이 Spleen을 낮을 卑자가 들어간 脾로 번역하고 pancreas를 새롭게 발견함에 따라 모인다[集, 聚]의 의미를 갖는 萃자를 고기 肉변에 붙이어 새로이 만들어 pancreas를 지칭하게 하였다. 췌장의 해부학적 인식은 유명한 蘭學子 衫田玄白(스기타 겐파구 1733~1817)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후 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眞 1768~1834)의 "醫範提要" (1805)에 膵라는 글자로 최초로 등장한다. 서양에서도 팽크리아스의 기능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19세기 중엽에나 프랑스 병리학자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의 토끼 해부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검토해 볼 때 우리가 한의학의 술어들을 번역할 때도 함부로 오늘날의 개념으로 단순한 문자상의 동일성으로 인하여 대입시킬 수 없다는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인체에 대한 개념의 토폴로지(topology 사전적 의미로는 지형 지세학을 뜻함.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인간이가진 개념의 지도를 뜻함. 곧 오운육기란 것이 인간이 가진 하나의 개념의 지도라고 볼 수 있음)가 전혀 다른 가설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확연한 인식이 없이 그 文意의 정확성이 기술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오늘날 한방의 많은 오류가 이러한 개념적 혼동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임상적 현실 또한 지적됨이 마땅하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心包와 심장막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洋方에서 통용되는 해부학적인 용어와 우리가 사용하는 무형적, 기능적, 경락학적인 이름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말하자면 洋方에서 말하는 기관적(organ)이름인 Kidney가 한방의 足少陰腎經과 동일하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舍岩針法강의를 40일간이나 듣고도, 洋方에서 신장염이라고 하니까 "음! 足少陰腎經을 補해야 되겠군" 혹은 위궤양이라니까 "음! 足陽明胃經을 놓으면 되겠군"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한의학을 그만 두십시오!
모짜르트는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전에 피아노를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여 배운 적이 있다는 사람에게는 수강료를 두 배로 받고 전혀 배운 적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반만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 바둑계의 명인인 사까다 역시 "바둑이 무엇인지 모르고 오는 사람은 단기간 내에 초단으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바둑을 좀 알고 오는 사람을 초단으로 만들기는 참으로 많은 기간이 소요된다"고 했습니다. 한의학이라는 이상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 여러분들에게도 五運六氣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강의의 총론이 끊임없는 잔소리의 연속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선입견을 배제시키기 위해서이지요. 잡초가 없는 땅이라면 그냥 씨를 뿌리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많은 자갈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자갈을 제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40일을 듣다 보면 "아-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군!" "내 마음을 관찰해야 되겠군" "경락은 모두 雙을 이루고 있군" "마음은 상대성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역대의 모든 성인이 말씀하신 경전과 "內經"의 원리올시다.
道를 팽개치고, 학문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마냥 洋方의 해부학적인 명칭에 이끌려 병명을 동일시하거나 기관(organ)과 기능을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것을 김용옥교수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자가 아닌 분의 이야기를 인용하게 된 것을 저는 수치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옛 성인의 말씀을 비유해야만 인정하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김용옥교수의 책을 읽어보면 그는 心包를 깊이 아는 大家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한의학자가 아니니까요 저로서는 오히려 "心包의 개념은 參禪學的으로 이렇게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라고 건의를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여러분들에게는 그분의 학문태도를 본받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의문이 많지요. 미국, 중국, 일본 등지로 다니며 공부를 해 보아도 우리나라 학문은 역시 우리말로 해야 된다는 것을 그분은 인식한 것이지요. 저 역시 의문과 반항과 정열의 학문적 정신을 존중합니다. 괴테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독일어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나의 생각입니다.
그분은 "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우리 東醫學者들이 해야 할 "內經"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옳으니 받아들여야지요.
김용옥교수는 "山林經濟(조선 후기 실학자의 한 사람인 홍만선(유암, 1643--1715)의 저작으로 농업과 의학에 대한 연구서)"라는 책에서 번역상의 결점을 발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이지요. 산림경제란 책은 의학서적이 아니고 '민중 속의 생활, 지혜 안내서' 정도로 씌여진 책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상당히 탁월하다고 하는 고전의 책 속에서 誤譯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 중공이나 대만에서도 터무니 없는 번역을 많이 하는데, 그러한 중공이나 대만 책만 번역하면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그 쪽에도 洋方 물이 들어 있는데다 자체적 결함이 없지 않은데 우리는 그저 그것을 번역해서 그들의 뒤만 쫓아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주체성 없는 어리석음이지요.
"心包는 심장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라는 심장의 부속기관적, 해부학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심장과 독립된 별개의 臟腑이다"라고 "內經"을 공부하는 韓醫學者도 하기 어려운 말을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용옥 교수의 제자 한 사람이 우리집에 놀러 왔는데 "동양철학을 하려면 반드시 內經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동양철학의 몇 구절도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김용옥교수가 역설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김용옥교수도 心包의 정확한 지칭은 못했지만 그게 심장을 둘러싼 막이 아님은 간파했습니다.
"아닌 것을 제거하다 보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고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이건 사랑이 아니지 않겠나" 하는 것을 제거해 보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김용옥교수가 心包의 개념을 설명은 못했지만 기존의 개념을 틀렸다고 지적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心包라는 장기의 개념 성립 과정이, 心包라는 해부학적 실체가 먼저 발견되고 나서 心包에서 시작되는 경맥이 상정되었다고 보기보다는, 十二經脈이 먼저 성립되고 난 후에 十二經脈 중 하나에 해당되는 어떠한 기능적 단위로서 心包가 상정되었다고 본다는 김용옥교수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감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화를 많이 내다 보니 그 에너지가 축적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했던 것이지, 화보다 창고가 먼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心包를 有名無形 또는 無相有用이라고 합니다. 막연하게 나마 권력욕, 지식욕, 명예욕 등 어떤 무형의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장기가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는 했지요.
옛날 사람들은 心包를 알았는데 우리가 모를 이유가 없지요. 그것에 대한 이미지를 탐사해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옛말에 "심보가 더러운 놈... 저 놈은 심보가 고약해!"이런 말이 있지요. 머리핀 하나 머리카락 하나의 증거를 가지고 날카롭게 수사를 해 들어가는 수사관과도 같은 날카로운 번득임이 있어야 됩니다. 옛날에 부산에 사시던 어떤 선생님은 제게 "수사관 노릇 3년만 하고 와라. 그러면 내 제자 만들어 주겠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사관 노릇 3년만 하면 한의학이 금방 이해가 된다는 그 말 뜻을 그 당시에는 이해를 못했었지요. 여러분 김용옥교수의 얘기들을 잘 새겨 들어야 됩니다. 정말 멋있는 말이지요. 논문 중에 최고의 논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용옥교수가 한방의 옆구리를 호되게 걷어찬 겁니다. '한방혁명 같은 소린 하지도 마라' 하고 한방 꽝 걷어찬 것이지요. 차마 눈뜨고 한국 한의학을 보아줄 수 없어서 誤譯된 것을 비판함으로써 서양과학의 똥이나 빨고있는 우리의 실상을 호되게 질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린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참으로 수치스런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못 받으면 학문적으로라도 인정을 받아야 되는데, 지금 한의학자들은 어느 한 쪽도 인정을 못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면허 돌팔이도 덩달아 대학교육을 얕잡아보고 있는 현실이지요.
어쩌면 한의대 나온 사람들이 五兪穴(사지의 원단(상지는 주부이하, 하지는 슬부이하)에 있는 상용혈위의 총칭으로, 이들 혈위는 임상상 거의가 비교적 상용되고 있는 유효한 혈위이다)도 못 외우고 十全大補湯(이 방은 인체의 기혈, 음양, 표리, 내외가 모두 허한 경우에 사용하는 것으로 사군자탕과 사물탕에 황기와 육계를 보태 열가지 약물로 이루어짐. 십전대보탕이 치료할 수 있는 증상으로는 전신쇠약, 빈혈, 심장쇠약, 위장장애, 몸이 약한 경우, 맥이 약한 경우 등)도 못 외우느냐고 합니다. 이건 정말 문제입니다. 반성해야 됩니다. 이 모두는 선배들이 뿌린 업인데 지금 그것을 불쌍하게도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래선 안되겠지요. 학문적으로 혁신이 된 눈으로 새로운 이론체계, 새로운 관점을 후배들에게 제공해 드리세요. 그리하면 서서히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한방이 개혁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김용옥교수가 주장하는 관점에 전적인 동감의 의견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心包를 추적하는데 있어서 三焦와 상응이 되는 기관이라고 하는 것 만으로는 불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五運六氣學과 經絡學的인 개념을 혼합시켜 얘기를 하면, 心包란 五運上 火요, 六氣上으로는 手厥陰, 즉 厥陰이라는 장기의 개념이며, 三焦 역시 五運上 火이며 六氣上으로는 手少陽 三焦, 즉 少陽이라는 개념의 장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五運上으로만 관찰해 보면 心包, 三焦는 물론 심장, 小腸이 모두 火에 속하게 되지요. 그러나 六氣的으로 따져보면 같은 火라도 少陽相火와 少陰君火가 다르고, 五行上의 心臟, 小腸의 火와 心包, 三焦의 火가 별개의 개념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심장과 소장이 五運上 둘 다 火이지만 六氣와 서로 어울려 돌아갈 때는 手少陰心經과 手太陽小腸經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므로 六氣的인 관찰에 들어가서는 少陰君火와 太陽寒水라고 하는 전혀 상반된 개념이 심장과 소장 경맥의 상황을 표현해 주게 됩니다. 이 차이점, 이 딜레머의 극복은 六氣개념의 해석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五行上 같은 火라 하더라도 위의 경우처럼 六氣상의 개념을 활용하지 않으면 그 경맥의 흐름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본다면, 여러분은 흔히 신장을 五行上 水라고만 알고 있는데 六經的으로 보면 足少陰腎이 됩니다. 그렇다면 腎을 生長化收藏, 春夏秋冬, 相生相克에 해당하는 五行上의 개념인 水로만 판단하느냐, 아니면 少陰君火의 개념으로 판단하느냐는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또 少陰君火만 하더라도 경맥상 手少陰과 足少陰으로 나뉘어 존재하므로 이렇게 둘로 나뉘어 존재하는 근거는 더욱 더 세밀한 분석을 필요로 하게 되지요. 이러한 고찰이 되고 있지 않는 기존의 한의학은 다리가 불구자인 상태로 한의학에 접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적인 차원에 있는 六經과 현대적으로 언급되는 리듬(신체, 감성, 지성) 그리고 六氣的인 관찰과 유물적, 유심적 관찰을 도표화 시킨 것을 일단 배정을 하고 외우셔야 합니다.

위 도표를 보면 돼지[亥]부터 시작하면 厥陰→少陰→太陰→少陽→陽明→太陽으로 변해가지요. 그러나 이 순서가 실질적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양상으로 변해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명예욕이나 지식욕을 많이 가진 사람[厥陰之氣]이 나이가 들었을 경우, 반드시 색을 밝히거나 쾌락을[少陰之氣] 추구하게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요. 다만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일 따름이지요.
그런데 명예욕, 지식욕, 혹은 색을 밝히는 것이나 재물에 집착하는 것 등의 이런 모든 것을 일컬어 소유욕, 즉 '먹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렸을 때 엄마 젖을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성장후 담배를 많이 피우지 않으면 욕구불만 되기 쉽답니다. 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아쉬운대로 자기 혓바닥이라도 빨게 됩니다. 그래서 관상학상 자기 입술을 자꾸 빨아대는 사람은 음탕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이 길을 가다가 멋진 남자를 보면 깊이 숨을 들어마시지요. 이것 역시 소유욕의 범주에 속합니다.
왜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피워대는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밥만 먹고 변을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변비증 환자라 하지요. 그런데 계속 지식만 얻고 망각을 모르는 사람을 두고는 변비증 환자라 하지 않고 오히려 '유식하다', '기억력이 좋다'고 합니다. 도가에서 볼 때는 이 또한 병자입니다. 이렇듯 앎을 저축시킬 뿐, 망각의 통로로 배설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手少陽三焦經으로 들어가는 담배같은 것을 피우게 되지요. 그것은 변비증 환자가 자기가 먹은 음식에 비하여 아주 조금 변을 보는 것이나 같지요. 바로 약물의 힘을 빌어서 三味에 빠지는 것입니다.
六經 중에도 陰이 붙은 것은 대체로 取하는 성질이 많습니다. 먹기만 하고 배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불행이 싫으니 太陰經絡만 발달되었으면 좋겠어. 陽明經絡(태음경의 반대개념)은 없으면 좋겠어", "나는 그냥 만나기만 하면 좋겠어, 이별은 싫어!", "난 무엇이든 알고만 싶어, 모르기는 싫어, 기억력이 남들보다 월등하면 좋겠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바보지요. 마음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식은 얻어서 쓰고 나면 버리세요. 헤어짐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나에게만은 이별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욕심은 無常(일정하게 고정되지 않음)합니다. 그래서 석가께서는 諸行無常이라 하시며 모든 것은 항상된 것이 없다고 갈파하셨던 것입니다. 노처녀는 신랑감을 얻고자 갈망하다가, 되지 않으면 그 구하고자 하는 욕심[少陰欲]이 빵, 우유, 아이스크림, 커피, 과일을 먹어치우는[太陰欲] 쪽으로 전변되기 쉽습니다. 노처녀가 곧잘 살이 찌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한 지식욕이나 권력욕, 명예욕을 가진 사람이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어느날 전혀 엉뚱하게 色을 밝히는 경우가 많습니다(厥陰欲이 少陰欲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될런지...) 이상의 여러 욕심들은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 근본은 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욕망을 스스로 잘 알지 못할 뿐더러 무의식 중에 감추며 살아 갑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요. 여자만 보면 지레 몸이 움츠러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학문 빼면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五運六氣를 보면 어쩔 수 없이 12년 내에는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하지요. 짧은 주기로는 6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생! 여자맛이 어이 이리 좋소. 거참! 신통하지..." 하다가 얼마후에는 "純粹理性이고, 비판이고, 칸트, 헤겔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더니, 그로부터 10년 후... "저는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저에게 한표를..." 아 글쎄 권력자가 되어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지요. 인간이란 이렇게 가변성의 동물입니다. 그로부터 또 10년 후... "세상 사는 재미란 그런 게 아니야 그저 돈 모으는 재미가 최고지..." --은행, ××은행... 아침 일찍부터 그저 은행을 들락거리며 돈이란 돈은 모두 통장에 저축하기가 바쁩니다. 이게 인간이 가진 대표적인 욕망의 변형이올시다.
어느 뚱뚱한 친구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도무지 욕망이 불만을 수반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먹을 것만 있으면 아무 바램이 없어요. 저는 또 생전 화를 내 본 적이 없습니다. 욕망이 불만을 수반한다는 따위의 말씀은 화 잘내는 저 사람에게 나 하세요" 그런데 이 뚱뚱한 친구가 맛있게 먹는 음식을 한 번 빼앗아 보세요. 그 누구보다도 격분하여 화를 냅니다.
"저는요. 성질이 조금 급하긴 해도 절대로 욕망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미묘한 동물이므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 하여도 자존심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사람에게 자기가 연구한 학문체계를 한 번 부정해 보세요. 혹은 그 사람의 종교관을 부정해 보세요. 천벌 받을 놈이라고 밤을 새워 욕을 하고도 분을 못 풀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저 불쌍한 사람을 용서하세요..." 말로만 용서지, 속에서 끓는 화를 억지로 눌러 두고 있는 거지요. 이게 바로 위선입니다. 우리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종교적 Ego, 정치적 망상,... 이런 것들까지 이해해야 하므로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깨어있지 않으면 마음의 無常性, 相對性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어렵지요. 여러분들도 지금 웃고 있지만, 그것은 여러분들 마음 속의 어떠한 위선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로서의 웃음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 그러면 이 心包와 三焦, 脾와 胃, 肝과 膽, 心臟과 小腸, 肺와 大腸, 腎과 膀胱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감정적 측면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識情 |
識情의 六經的 觀點 |
惡 |
惡의 六經的 觀點 |
識 |
心包 |
不識 |
三焦 |
意 |
脾 |
失望・挫折 |
胃 |
喜 |
肝 |
怒 |
膽 |
愛 |
心 |
惡 |
小腸 |
(快)樂 |
肺 |
哀 |
大腸 |
欲 |
腎 |
恐 |
膀胱 |
陰 |
肯定 |
陽 |
不定 |
위에 있는 이 도표는 외우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전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 우선은 위 도표를 개의치 말고 제 이야길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인공이 되어 제 이야기에 출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과 학생하고 자주 만나면 헛 소문이 떠도니, 어느 명문대학 애들과 미팅을 하고자 어울린 한의대 여학생 한 무리가 있다고 하는 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註:이 이야기는 마음의 전체성과 미묘한 심리변화, 욕망 등을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꾸민 - 講師 金烏가 지어낸- 것일 뿐입니다).
남학생 열 다섯명, 여학생 열 다섯명이 다방에서 만났습니다. 서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눈은 다소곳이 내리깔고는 얌전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미 다 훑어봤습니다. 그런데 유수한 명문 대학생이라 해서 기대가 컸었는데 막상 보니 실망이 커요. 15명 모두 한결같이 마음에 들질 않아요. "오늘 실망이다. 얘!" "대강 놀다가지 뭐" 고개 푹 숙이고 수줍어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파트너가 정해졌습니다. "저는 경상도 안동의 양반으로서... 미래에는 어쩌고..." "저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못하고..." 대답은 "네. 네..." 하면서도 속으론 "남자 자식이 술 담배도 않고 무슨 재미로 사냐? 웃기고 있네" 합니다. 기분이 나지 않으니 차 맛도 없고, 그저 심드렁하니 돌아오는 길에 굳이 묻지도 않은 하숙집 전화번호까지 손에 쥐어 줍니다. 다음날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에 나갔는데 어디서 뛸듯이 반가운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는 인삿말이 들리고, 그 지겨웠던 어제의 파트너가 등장을 합니다.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예에? 어... 어제 미팅에서 만났던..." "전 기억이 안나는데요?" (기억이 안나기는 그냥 모르는 체 무시하는 거지)
이런 상황은 저(金烏)와 여러분 사이에서도 종종 생깁니다. 밖에서 우연히 대폿집 같은 데에서 만났을 때 "안녕하십니까? 금까마귀 선생님!" 하면 "저는 모르겠는데요" 합니다. "제가 선생님 강의를 들어서 선생님을 아는데요..." "글쎄. 전 잘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합니다(사실 여러분이 제 무엇을 안다는 겁니까?) 자! 이쯤 되면, 여러분 심경에 어떤 생각이 들어가게 됩니까? 금새 기분이 틀어지지요. 안다는 사실이 가진 쾌락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 자네. 기억하지. 강의때마다 맨 앞에 앉아서 파편(침) 많이 맞았지"라고 말하면 자기를 내가 알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마음이 감동으로 물결칩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 심중의 작은 감정 하나에 불과합니다. '識情'이라고 하지요(주의를 기울여서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자! 한글자 (*을과 지로 합성된 글자)를 써볼까요!
(안다는 것은 위의 글자 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자입니까? (독자 여러분도 알아 맞춰 보세요). '을'자, '지'자? ... 무슨 자? ...(대답이 가지가지 입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말하기를 "모르겠는데요" 예! "모르겠는데요"가 정답입니다. 이런 한문은 옥편에 없습니다. 제가 처음 써 본 글자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모른다고 말하기는 싫고, 모른다고 하면 왠지 수치스럽고 해서 자꾸 답을 주워 섬기려 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마음은 여러분들이 집착하는 '앎'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까 중단되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르겠노라고 그럴듯하게 시치미를 떼자, 당황해 하던 그 남학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청바지에 손을 깊이 넣고는 자신의 매력없음을 한탄하며,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걸어 갑니다. 그 순간 여학생의 가슴이 찡하게 아파왔어요. "내가 순진한 남자를 너무 희롱했나봐" 이번엔 그의 장점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보세요. 돌석씨"하고 불렀어요. "예? 예!" 이 친구가 되돌아 봅니다. "아이- 미안해요. 여자가 처음부터 아는 척 할 수 있나요?" 모성애가 발동을 했는지 남자 사기를 돋워 주는 사이 두 사람은 조금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안다는 사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연출시킵니다.
코미디언이 "지금부터 지리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인도의 수도인 런던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면 사람들은 와- 하고 웃습니다. 청중들이 왜 웃습니까? 서너살 된 애들은 웃지 않는데... 인도의 수도가 런던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의 '아는체'하는 의식을 역 이용하는 사람이 바로 개그맨 부류의 직업인 입니다.
제가 어느 대학교 강의 첫시간에, 바지를 양말에 집어넣고 Y사쓰를 바지 밖으로 빠져나오게 해서 입고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웃든 말든 저는 계속 강의를 했습니다. 웃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보편성,상식을 초월한 옷차림을 했다는 것이 이유이겠지요. 코미디언들도 마찬가집니다. 실수나 불완전성을 연출하는 거지요. 너무 완벽하면 매력이 없거든요. 아주 잘 생기고, 달변이고, 돈도 잘 쓰고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머리칼이 좀 부수수하거나, 눈꼽이 끼었다거나,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하나쯤 끼어 있어야지, 몸에서 향수 내음이 나고 온통 유명메이커 옷으로 치장을 한 사람은 꺼립니다. 옛날 서양의 왕궁에서는 광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단체 내에도 웃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날 왜 그렇게도 많은 수의 개그맨들이 인기를 얻을까요? 어린아이들은 왜 그렇게도 개그맨을 좋아할까요? 어째서 실수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코미디언이 인기가 좋겠습니까? 이것은 아는 일에 지친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것을 배려한 신의 조화입니다. 아는 일 만큼이나 모른다는 것이 중요함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어쨌거나 위의 두 사람은 안다, 모른다의 시비를 넘어선 사이가 되었습니다.
여학생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기도 뭐 그리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래! 저정도 남자면 한 번 교제를 해 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뜻을 세우게 되면 어떤 차원을 지나게 됩니다. 제가 강의를 한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들어볼까 말까하고 마음의 갈등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선배들의 조언도 구해 보고 40일 동안의 투자에 대해 손익계산서 작성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결정을 내릴때까지 많은 생각을 해보고 이 강좌를 듣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여학생 역시 어제까지는 마음이 없다가, "한번 교제를 해 볼까?" 하고 뜻이 서려하자 그 못생기고 밉상이던 상대가 조금씩 달라보이기 시작합니다. '명문대학을 다닐 정도면 공부도 꽤 했을 것이고, 마음 중심도 서 있을거야. 힘없이 돌아서던 모습으로 보아 의외로 순진한 것 같애. 그래 사람이 너무 실리적이어도 곤란해' 아직 연민, 사랑, 그리움 등의 단계는 아니지만 만남의 시작에 해당하는 '뜻'이 일어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보세요. 돌석씨"하고 불렀을 때 반가와서 어쩔 줄 몰라하던 돌석의 모습이 이제는 밉기는커녕 슬며시 흐뭇해지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두 사람은 서로의 전공에서부터 시작하여 취미, 인생관까지 서로의 뜻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가 조금씩 확인을 하기 시작합니다(벌써 이 단계에서 소유감각이 개입됨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이 여학생에게 돌석이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얘. 돌석씨란 사람 어때?" "응. 그저 그래" 별 사심없이 말합니다. "나 파트너가 필요한데 내일 하루만 파트너로 하면 안되겠니?" "뭐? 뭐야" 친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마음 속에서 원인모를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개인적으로는 별 욕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사람을 네가 알려고 해?' 하는 상황에 이르자 소유욕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툭 하고 튀어 나왔습니다. "얘. 별 사이도 아니라면서 뭘 그러니?" "얘! 그래도 네가 그럴 수 있니?" 시기 질투를 느끼진 않지만 주기는 아깝고 자기가 갖기는 또 좀 그렇고 한 이 식정(識情)의 단계에 벌써 미묘하나마 소유감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럭저럭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각자 자기네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게 됩니다. "야! 난 6년 후면 무위도식해도 또 내가 술먹고 병이 나도 다 고쳐줄꺼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레코드 음반을 선물해야겠는데 재즈가 좋을까, 클래식이 좋을까?"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친구와 연구도 하게 됩니다.
결국 베에토벤 Symphony 5번 디스크를 사서 여자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상대방에게 정확히 맞는 선물을 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와 시사성이 내포된 것입니다). 아주 만족해 하는 여자를 보고 돌석이 말하기를 "말자씨가 기뻐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오늘은 disco hall에 가서 한 잔 사겠습니다. 춤이나 한 번 추실까요?" "숙녀에게 무슨 실례의 말씀이에요? 나는 디스코 출 줄 몰라요" 이렇게 하는 사이에 둘 사이는 점점 깊어갑니다. 이름과 성을 알고 난 뒤에는 '六感(眼・耳・鼻・舌・身・意)'의 접촉이 시작됩니다. 이게 바로 12인연론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섯 감각기관의 접촉에 의해 인식하고 뜻을 세우게 됩니다. 결혼 동기를 예로 들어보면, 얼굴이 예뻐서, 목소리에 반해서, 그 여자의 향수가 어릴 적 어머니 분냄새 같아 마음이 편안해져서...이렇듯 접촉에는 뜻[意]이 따르게 되고, 뜻이 생기면 갈등을 하다가 좌절감 또는 성취감을 느끼게 됩니다. 뜻에 뒤따르는 상대개념으로, 뜻을 이룬 성취감을 脾主思, 脾主意로 본다면, 뜻을 이루지 못한 실망감 좌절감은 胃가 主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六經的으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럭 저럭 정이 깊어져 뻐드렁니도 늠름해 보이고 빈대코도 화통해 보이게 되자 그 남학생을 생각함에 가슴 울렁거리는 즐거움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전에 돌석이를 파트너로 빌려 달라던 여자가 돌석이와 어딜 놀러갔다 왔다고 자랑을 합니다. 격분한 말자는 당장에 돌석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어요?" "어! 말자씨 모르셨군요. 그 친구(말자친구)가 말자씨 허락을 얻었노라고 하도 간청을 해서..." "그런 적 없어요" 화가 난 말자를 바라 보며 돌석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돌석은 빙그레 미소하며 "말자씨에게 그런 성격이 있는 줄 몰랐는데요!" "뭐예요? 화난 사람 약올리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성낸 말자씨 얼굴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사실은, 그 날
저는 나갔다가 제 친구를 소개 해주고 바로 돌아왔습니다. 말자씨를 두고 제가 어찌..." 이 말을 듣고 말자의 마음은 봄눈 녹듯 풀렸습니다.
이 상황이 세 번째 단계인 '喜'와 '怒'. 즉 기쁨과 슬픔의 단계입니다. 이때의 분노는 아직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 날의 일을 계기로 서로의 소유감각이 좀 더 짙어졌을 뿐. 이날 이후로 두 사람은 손목과 팔짱을 넘어섰습니다. 손목→팔짱→어깨→허리로 손을 두는 위치가 바뀌어갔습니다.
"말자씨 우리 어디 여행이나 한 번 가실까요?" 이런 제의가 자연스러워지던 어느 날 두 사람은 1박 2일 코스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놈의 차가 그리도 복잡한 지 말자 히프를 이 놈도 툭 건드리고 저 놈도 툭 건드리는데, 보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돌석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어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돌석은 말자를 다그칩니다. "아니! 여자가 그렇게 둔해서 어떻게 해?" "난 자기하고 얘기하느라 몰랐어" 그래도 화를 진정치 못한 돌석은 "말자는 내가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를거야!" 말자는 '드디어 돌석씨가 나에 대한 사랑에 빠졌구나' 전에는 바닷가에 가면 생선회 생각밖에 안나더니 이젠 상대방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때쯤이면 자기 파트너가 지나가는 남자나 여자와 눈만 마주쳐도 속에서 화가 치밉니다. 바야흐로 두 사람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됩니다(道家에서는 점차 위험해 진다고 하지요). 만나기만 하면 으슥하고 어두은 공원 구석을 찾게 되고, 남들이 종로 2가를 팔짱만 끼고 가도 욕하던 사람들이 허리를 껴안고 몸의 거의 절반을 밀착하고 걸어가는 파렴치한이 됩니다.
바로 '愛'와 '樂'의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젠 하루만 못 봐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함께 걷던 오솔길, 노을이 붉게 물든 바닷가, 그가 들려주던 시, 이 모든 것들이 알알이 추억으로 아로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소유인 양 생각하고 있던 어느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약속 장소에 말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당황한 돌석은 어쩔 줄 몰라합니다. "약속장소가 틀렸나?" "아닌데" 30분, 1시간, 2시간이 지나고... 그런데 저만치서 말자 동생이 헐레벌떡 달려옵니다. "언니가...흑흑...언니가 백혈병으로 ○○종합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이젠 눈물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애간장을 끊는 애절함. 이 애절함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쾌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쾌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哀와 樂의 중간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이올시다.
그런데 일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죽지 않고) 더 진전이 되어 서로 결혼을 하는, 즉 바로 욕망의 단계입니다. 결국, 이 지상세계는 곧 욕망의 세계입니다. 불교의 三世論에 보면 欲界 위에 色界, 色界위에 無色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자기 소유를 강조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어떻게 내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그저 부모의 몸을 잠시 빌어 태어났을 뿐인데 어떻게 부모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까? 죽으면 한 줌의 흙도 못 되는 이 장래의 시체를 누구 것이라고 소유를 밝히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옛날 일곱 賢女가 숲을 거닐다가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한 여자가 "시체는 여기 있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는고?" 이 말에 일곱 사람은 일제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앞의 두 사람과 같이 애절함과 슬픔이 지대하다 보면 閉氣가 되고, 또한 氣가 소멸되어 중병이 생기게 되고 더불어 공포가 수반됩니다. 그래서 욕망과 공포는 상대적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욕망이 너무 크게 되면 의처증과 의부증이 생기게 되어 구타와 구속의 공포를 초래하게 되고, 소유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집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합니다. 이런 것의 근본이 바로 공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참고로 정리를 해 보면 마음이 움직이는 앎의 성정은 心包경에 해당하고, 모른다고 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三焦經에 해당이 됩니다. 어떤 일에 뜻을 가짐의 심적 상황은 脾經, 그 뜻의 좌절은 胃經, 기쁨의 마음은 肝經, 분노는 膽經, 사랑의 감정은 心經, 싫어하고 꺼리고 경계하는 것은 小腸經,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론에 가면 상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왜 이런 식으로 장황히 설명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차차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처음엔 미미하게 얼굴을 익힌 정도에서, 뜻을 가졌다가, 차차 서로 즐기며 기뻐하다가, 사랑하게 되고, 그 다음엔 아주 즐김을 탐[快樂]하다가, 급기야 욕심을 내게 되는 여섯 단계의 마음 유동의 '無常性'을 깊이 공감하면 굳이 臟腑와 결부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로 들어드린 이 이야기는 앞으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어떠한 관계에 있을 때 스스로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때 그때 상황이나 표현형식은 다 달라도 그것들은 이 여섯 단계의 마음 변화 속에 다 포함이 될 것입니다. 옆집 처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데 오느날 그 여자가 시집을 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 며칠씩 술을 마신다거나, 오드리헵번을 열렬히 사모하여 방안에 그 여자 사진을 붙여 놓았다가, 다른 영화에서 어느 남자 배우와의 키스신을 보고는 그 여자의 사진을 뜯어내며 이틀밤을 울었던 저의 경우, 그저 이미지만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이렇게 질투가 動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이 현실에서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그것이 일게 된 배경을 찾아 보세요. 애초에 내가 이 일을 접하여 알지 못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원점으로 돌아가 보세요. 시중에 유행하는 T M명상술의 첫 수련과정이 어떤 생각의 처음을 觀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道로 향하자고 하는 것은 識情, 즉 소위 안다, 모른다 하는 識情에서부터 욕망과 공포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관찰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된 사람일수록 욕망과 공포가 없어 얼굴이 맑지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욕계이므로 질병이 많이 생깁니다. 공포로 인해 몸이 冷해지고, 부질없는 시기, 질투로 인해 膽에 結石이 생기고, 쓸데없는 의심, 생각이 너무 많아 脾가 약해지고 소화기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유심적인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강의를 그저 웃음으로 넘기지 말고 전체적으로 깊이 살펴보시면 여러분들 스스로 그 주인공들과 조금도 다른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 역시도 常情에 매여 있구나! 나 역시도 見物生心인 걸 보니 내게도 도둑놈의 기질이 있구나! 아, 내가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 역시도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구나! 왜? 여러분들 몸 속의 경락이 모두 그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사용하지 못한 경락을 없는 것으로 알고 '나는 그렇지 않다' 하며 스스로 예외의 존재인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깊이 느끼고 알아서 인정하게 되면 常情, 盜性, 戀愛...등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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